트럼프 ‘즉흥 외교’로 초토화되고 있는 美 대외정책

이정필 기자 / 기사승인 : 2020-01-03 07:5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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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이정필) 미국의 대외정책은 2차대전 이후 최악의 상황이며 혼돈의 심연 속에 빠져들었다. 미국은 지구촌 초강대국의 지위를 거저 얻은 것이 아니다.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끌었고 냉전종식 후 일관성 있는 초당적 외교정책을 구사했으며 외교 대상국들과 쌓아온 신뢰가 그 기초였다. 그러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재임 3년 동안 벌어진 조령모개(朝令暮改)식 외교정책은 세계를 이끈다고 자부하던 국무부를 3류 정책기관으로 전락시켰다.


워싱턴을 달구고 있는 미 하원의 대통령 탄핵안 통과는 트럼프의 대표적인 외교참사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의 관계를 통해 자신의 정적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에게 불리한 여론을 조작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정치적 혼란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시스템으로 움직여야할 미국 최고의 엘리트 기관인 국무부는 인력난에 허덕이며 세계 곳곳에서 터지는 외교참사로 자괴감에 빠져들고 있다.


미국인들에게 대통령의 외교 실패는 그저 창피스런 해프닝으로 넘어갈 수도 있지만 관련된 국가에게는 작은 일 하나라도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이로 인해 전미국의 언론은 연말을 앞두고 트럼프의 대외정책 실패를 앞다퉈 다루고 있다.



트럼프와 이방카, 폼페이오 국무장관
트럼프와 이방카, 폼페이오 국무장관

워싱턴 외교가는 트럼프가 초래한 ‘즉흥 외교’가 전 세계를 위험에 빠트렸다는데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다. 미래학자 폴 케네디교수는 자신의 베스트셀러 “강대국의 흥망”을 통해 “요컨대 일단 확립된 초강대국이 자신의 지위를 활용하지 않으면 다른 나라들이 그것을 노리고 도전하는 형국이 나타난다”며 역사 속에 등장한 강대국의 외교공백이 초래할 상황에 대해 경고했다.


지금 미국의 대외정책은 방향을 잃고 표류하고 있으며 이런 공백이 세계 패권을 놓고 호시탐탐 도약을 노려온 중국과 러시아에게 어떤 기회로 작용할지 시계제로의 상황이다.


미국의 외교 정책은 그 특성상 평가하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다. 과거 백악관은 국내에서 안정적인 지지를 받던 시절에도 대외정책의 문제가 더러 발생했고 실패를 경험했던 일도 많았다. 하지만 지금 백악관과 국무부의 모든 외교 정책은 방향성과 일관성 모두가 실종상태로 전 세계의 비아냥거리다. 지난 3년 동안 벌어진 미국의 외교참사를 돌아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란 핵 개발 치닫게 한 ‘6+1 핵 협정’ 탈퇴


트럼프는 취임하자마자 미국(영국, 프랑스, 독일, 중국, 러시아)과 이란이 맺은 ‘6+1 핵 협정’ 파기를 시사했다. 이란의 핵개발 중단에 지불하는 대가가 너무 높고 중단할지도 알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결국 트럼프는 지난해 독단적으로 이란과의 핵협정 탈퇴를 선언했다. 이란을 협상테이블로 나오게 만든 나머지 5개국의 노력을 무산시킨 외교참사였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새로운 의제를 제시하며 이란과의 재협상을 발표했지만 이란은 꿈쩍도 하지 않고 있다.


이란의 핵개발은 현재 우라늄 농축 기술개발 단계이기 때문에 북한과 달리 불가역적으로 중단시킬 수 있는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미국은 제재 이외에는 그 어떤 협상방법도 갖고 있지 않다. 트럼프는 “기승전 오바마 반대”를 고집하면서 오바마대통령이 사인한 협정을 파기시키고 이란을 상대로 “겁쟁이 게임”을 시작했다. 이란은 결과적으로 2015년 중단했던 핵개발의 재가동을 향해 성큼 나아가고 있다.



지난 해 7월 하노이에서 열렸던 북미정상회담
지난 해 7월 하노이에서 열렸던 북미정상회담

갈팡질팡 북핵(北核) 외교


이란과의 협상 파기가 미국에 주는 부담감은 북미관계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미국이 신뢰 외교라는 틀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북한의 김정은과의 "브로맨스 관계"를 자랑해왔지만 최근의 상황은 그 반대를 향해가고 있다. 지난여름 극적인 판문점 회담 이후 대화는 끊겼고 크리스마스 선물을 둘러싼 양국의 날카로운 대립상만 나타나고 있다. 아직까지 외교참사라고 예단할 순 없지만 대북외교와 관련해서 미국은 수동적 협상파트너다.


북한은 핵보유를 기정사실화했고 미국은 이를 무산시키고자 협상에 나섰다. 그렇기 때문에 지난 2월 하노이 회담 결렬 이후 트럼프에게서 협상 카드가 모두 빠져나갔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상황이다. 다만 지난주 한국을 방문한 스티븐 비건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가 예정에 없던 중국방문을 계기로 양국사이에 새로운 협상 가능성의 희망을 남겼지만 여전히 트럼프와 김정은의 입장에 대대적인 변화가 생긴 것은 아니다.


북한은 유엔 제재 철회가 먼저라고 주장하고 미국은 검증가능한 핵무기의 완전 폐기를 요구한다. 양국사이에 협상의 폭은 좁고 누군가 먼저 양보하기 전에는 타협이 이뤄지기 어려운 구도다. 트럼프가 유일하게 자랑하는 북한과의 관계도 결국 외교력이 아닌 “겁쟁이 게임” 양상으로 치달으면서 북미대화가 끊긴다면 실패의 책임은 고스란히 트럼프에게 넘겨질게 뻔하다.



러시아 영향력만 키워준 시리아 철군


1년 전까지 시리아에는 미국 외교가의 최고 인재로 통하는 짐 제프리 대사가 있었다. 그에게는 시리아 내전에 대한 미국의 3가지 목표가 주어졌었다. ISIS 제거, 정치적 안정, 그리고 이란의 시리아 내전개입 중단이었다. ISIS 제거가 완수된 상황에서 시리아에서의 미국의 영향력이 뿌리를 내릴 기회였다. 그러나 트럼프는 제프리 대사를 계속해서 방해했다.


결국 국무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군 철수가 결정됐고 시리아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만 더 강화시켜준 꼴이 돼버렸다. 시리아는 역사적으로 친러시아 중동국가로 이란과는 우호관계이며 미국에게는 골치 아픈 존재였다. 그러나 내전이 시작되면서 미국은 시리아 및 중동에서의 영향력을 높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갖게 됐지만 트럼프의 변덕으로 그 기회는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작전 중인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
작전 중인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

중동을 적으로 돌려버린 일방적인 이스라엘 주권 인정


미국 대통령은 누구나 중동평화를 원한다고 말해왔다. 트럼프도 예외가 아니었고 자신의 사위이자 백악관 선임고문인 제러드 쿠슈너에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평화협상 중재를 맡겼다. 그러나 트럼프는 이스라엘 미국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옮겼고 이스라엘에 대한 일방적 주권인정을 혼자 결정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레이트를 제외한 모든 중동국가들이 미국을 비난하고 있으며 팔레스타인을 협상테이블로 부르는 일은 당분간 불가능한 일이 돼버렸다. 더 놀라운 일은 2주전 상원외교위에 나온 국무부 중동 책임자의 입에서 “백악관이 앞으로 어떤 계획을 갖고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고 말한 것이다.



미궁에 빠진 아프가니스탄과 인도·파키스탄 정책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미국의 진흙탕이다. 식민지 제국시대 영국이 들어갔다가 도망쳐 나온 곳이며 구소련의 멸망 원인을 제공한 곳이다. 이미 언론을 통해 아프가니스탄 전쟁 비용이 천문학적으로 불어났다는 문제는 상황을 더 나쁘게 만든 것일 뿐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정책은 이미 실종된 지 오래다.


잘메이 칼리자드 미국대사는 수년동안 종전과 포로교환 협상을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지난 9월 트럼프는 탈레반과 만나겠다는 결정을 트위터로 공개해 국무부를 혼란에 빠트렸다. 그러나 정작 탈리반과의 미팅은 수일후 트위터를 통해 취소됐고 칼리자드 대사가 노력해온 협상은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다.


핵무기 보유국가인 인도와 파키스탄은 카시미르 국경 문제로 또 다시 긴장국면이다. 양국 간의 중재역할은 언제나 미국의 몫이었고 지역 안정에 미치는 중요한 영향력이었다. 그러나 인도 정부는 트럼프의 개입을 대놓고 거부했다. 베네수엘라의 니콜라스 마두로 정부는 군부 지원을 바탕으로 혹독한 인권유린사태를 촉발시켜 세계를 걱정시키고 있지만 미국으로서는 현재 강 건너 불구경이다.



미중 무역분쟁
미중 무역분쟁

중국 입지만 키워준 미·중 무역분쟁


대중국 외교정책도 1단계 무역협상 타결로 숨을 고르는 형국이지만 트럼프의 외교술은 모든 측면에서 바닥나버렸다. 그를 지지하는 후버연구소 선임연구원 빅터 핸슨 박사는 내셔널 리뷰 기고를 통해 “19세기 유물인 관세와 무역보복을 전략으로 들고 나온 트럼프가 대륙의 풍차를 향해 달려가는 돈키호테 같다”고 조롱했다.


그는 “미국 보다 4배의 인구를 가진 중국이 헤게모니를 쥐는 것은 시간문제인데 무역분쟁을 일으켜 중국의 입지만 키워줬다”며 이제는 “초당파 외교전문가들 조차 중국의 우위를 막자는 게 아니라 미국의 쇠퇴를 걱정할 지경”이라며 트럼프의 외교 실책을 지적한다.


결과적으로 핸슨 박사는 다음과 같은 분석을 하고 있다. 중국은 단 한 번도 트럼프의 겁박에 넘어간 적이 없었으며 중국으로서는 트럼프의 비위를 맞추는 방식으로 최대한 시간을 끌어왔다. 이제 1단계 협정에 사인한 그들의 속내는 다음 선거에서 누가 대통령이 됐던 중국이 미국에 맞짱뜨는 강대국으로서의 위상을 차지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핸슨 박사의 분석이 100% 옳은 것은 아니지만 중국이 강대국으로서의 지위를 원한다는 사실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이 때문에 불가피한 미국과의 충돌이 예견되면서 미국의 대외정책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지만 지난 3년 미국은 유럽을 비롯한 전통 우방국들에게 리더로서의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무기력하게 폐기되거나 답보상태에 빠진 미 대외정책


2차대전 이전까지 미국은 “고립주의”(isolationist policy)를 명목으로 소극적 대외정책을 구사한 적이 있다. 하지만 세계 역사는 미국의 고립주의를 허락하지 않았다. 미국은 새로운 정치 환경을 받아들였고 초강대국의 입지를 다져왔다. 월드 리더로서의 대외정책을 구사해 냉전의 승리자가 됐고 새로운 질서를 구축했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테러와의 전쟁이 벌어졌지만 이 때문에 미국의 힘이 빠졌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또 세계가 3차 대전에 직면한 것도 아니다. 변한 것은 3년전 미국의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됐을 뿐이다. 영국의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트럼프 재임중 미국의 거의 모든 대외정책이 무기력(impotent)하게 폐기되거나 비생산적(counterproductive) 진행으로 답보상태에 빠져버렸다"고 진단한다.


미국 대통령의 조건에 외교능력이 우선순위는 아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 시대의 지구촌 시민들은 미국의 대외정책 부재로 인한 북안이나 이란이 아닌 세계 어느 곳에서도 발생가능한 긴장상태의 태동을 주시하게 됐으며 지역 패권을 놓고 새판을 짜려는 중국과 러시아의 도전에 공포감마저 느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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