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협회의 가소로운 징벌적 손해배상 반대론

고일석 기자 / 기사승인 : 2020-06-22 05:2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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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식 손해배상제가 좋다는 기자협회
미국의 평균 손해배상액 20~25억 원
'자유'에 대한 엄중한 '책임'을 묻는 징벌적 손해배상제
너무나 쉽게 입증할 수 있는 한국 언론의 '현실적 악의'
징벌적 손해배상제 여론조사/미디어오늘
징벌적 손해배상제 여론조사/미디어오늘


미국식 손해배상제가 좋다는 기자협회


한국기자협회는 지난 17일 <[우리의 주장] 언론 보도 징벌적 손해배상제 신중해야>라는 제목으로 더불어민주당 정청래 의원 등이 발의한 언론중재법 개정안에 대한 반대 의견을 밝혔다. 이 법안은 언론의 악의적 보도로 인격권이 침해된 경우, 법원은 손해액의 3배를 넘지 않는 범위에서 손해배상을 명할 수 있는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를 도입하는 내용이다.


기자협회는 법안 제안 이유에서 미국식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을 언급한 것에 대한 미국 현직 언론인들의 의견을 인용하고 있다. 이들은 “미국에서 법은 기자들에게 손해를 입힌다기 보다 기자를 보호하기 위한다는 개념이 강하다. (미국에서) 기자들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할 경우 기자와 언론사가 악의를 갖고 해당 보도를 했다는 것을 증명해내는 것은 원고의 책무이며, 승소는 어렵다”고 말했다고 한다.


기자협회는 정청래식 손해배상제가 불만이고 “기자를 보호하기 위한 개념"으로서의 미국식 손해배상제가 좋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만약 기자협회가 미국식 제도의 도입과 적용을 주장한다면 나는 기꺼이 지지할 의사가 있다.


 


6월 17일 한국기자협회보
6월 17일 한국기자협회보


미국의 평균 손해배상액 20~25억 원


미국 현직 언론인들이 "승소가 어렵다"고 말하는 미국식 손해배상제도를 우리나라가 그대로 도입한다고 해도, 우리나라 언론사 대부분은 수십억 원의 손해배상을 해야 할 일이 줄을 이을 것이다.


1999년 언론중재위원회 정기세미나에서 배금자 변호사가 발표한 <보도와 명예훼손-한미간 비교를 중심으로>를 참고하면, LDRC의 1999년 보고서는 1998년 공인이 제기한 소송에서 언론 승소율이 75%에 달한다고 하고 있다. 이는 25%의 소송에서 언론사가 징벌적 손해배상 판결을 받는다는 얘기다.


이 자료는 미국의 평균 위자료가 150만~200만 달러라고 제시하고 있다. 우리 돈으로 약 20~25억 원에 해당한다. 즉 미국의 경우 언론에 대한 명예훼손 소송 중에서 25%는 언론이 패소하여 평균 20~25억 원의 위자료를 배상하고 있다는 얘기다.


 



'자유'에 대한 엄중한 '책임'을 묻는 징벌적 손해배상제


미국은 명예훼손에 대한 형사 처벌이 없다. 반론권도 제공되지 않는다. 따라서 가해자에 대한 처벌과 피해자에 대한 피해 보상과 복원을 오로지 이 '징벌적 손해배상'으로 처리한다. 우리 법체계로 치면 형사는 없고 민사만 있는 셈이다.


'징벌적 손해배상'은 '자유'를 적극적으로 보장하는 대신 자유에 따르는 '책임‘에 대해 엄정한 ’징벌적 배상책임'을 부여하는 제도다. 무제한에 가까운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는 대신 명예훼손이 인정되면 손해배상의 규모가 ‘징벌’을 대신할 만큼 크고 치명적이다. 이런 논리에 따라 ‘언론의 자유’가 적극적으로 우선시되고, 피해자는 언론 보도의 ‘악의성’을 입증해야 할 책임을 지닌다.


이것이 언론법제를 공부한 사람이면 누구나 배우게 되는 1964년 미국 「뉴욕타임즈 대 설리반 사건」에서 확립된 '현실적 악의(actual malice)'의 입증 책임이다. 이 사건에 대해 미국 연방대법원은 헌법상 언론 자유의 보호대상으로 하여, 공직자인 원고가 '현실적 악의(actual malice)'를 입증하지 못하면 언론은 명예훼손의 민사 책임을 지지 않게 했다.


이 판결에서 미 연방대법원은 '현실적 악의'를 "문제된 표현이 거짓임을 알거나 거짓인지 여부를 무모하게 무시한 것"으로 정의했다. 기자협회가 사전까지 찾아가면서 "주관적 정성적 평가여서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수준이 될 수 있다"고 우려한 '악의성'은 바로 이 '현실적 악의'를 말한다.

 


1964년 뉴욕타임즈 대 설리반 사건의 계기가 된 뉴욕타임즈 보도


너무나 쉽게 입증할 수 있는 한국 언론의 '현실적 악의'


만약 이 제도를 그대로 우리나라에 도입해 '현실적 악의'에 대한 입증 책임을 공인인 원고가 진다고 해도, 이를 간단하게 입증하여 해당 언론사에게 징벌적 손해배상을 물릴 수 있는 언론의 '악의적 보도'는 널리고 널렸다.


한국일보의 "조국 딸, 두번 낙제하고도 의전원 장학금 받았다" 보도가 대표적이다. 이는 명백히 허위다. 뻔히 한 번 유급한 뒤 장학금을 받고 그 뒤에 다시 유급한 사실을 알고도 이를 "두 번 낙제한 뒤 연속적으로 장학금을 받은 것"으로 순서를 작위적으로 뒤바꿔서 보도한 것은 굳이 '현실적 악의'를 입증할 필요도 없이 그 자체가 '현실적 악의'다.


SBS의 <청문회 중 전격 기소…연구실 PC에 ‘총장 직인 파일’> 보도 역시 마찬가지다. 이 보도로 인해 정경심 교수는 소위 '기생충식 수법'으로 표창장을 위조하기 위해 만든 '총장 직인 파일'을 연구실 PC에 저장하고 있던 것처럼 오인됐다. 이로 인한 피해는 간단히 몇 마디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다.


그러나 SBS는 그 보도가 사실인지 여부를 확인하려는 노력이나 행위를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가장 확실한 확인은 검찰 수사팀에 확인하는 것이겠으나, SBS가 스스로 말하고 있는 것처럼 검찰은 보도 당시에도 그 사실을 부인했고, 재판 과정에서도 "그런 사실은 없었다"고 다시 확인했다. 즉 SBS는 당시 자신들의 보도가 '거짓인 줄 알았거나 거짓인지 여부를 무모하게 무시한 것'이다. 이는 명백한 '현실적 악의'다.


 


2019년 8월 19일 한국일보 보도


비현실적 손해배상액을 겨우 3배 정도 높이는 정청래법안


미국식 제도가 우리나라에 적용되고 있었다면 한국일보와 SBS는 20~25억 원은 기본으로 배상해야 했을 것이며, 더구나 해당 보도로 인한 피해는 가히 한국 언론사상 최악의 수준이므로 배상액은 수십억 원 수준을 훌쩍 뛰어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언론 보도에 의한 피해의 손해배상액은 비현실적으로 적다. 미디어오늘이 5월 20일 보도한 언론중재위원회 ‘언론판결분석보고서’에 집계된 2009년~2018년까지 10년간의 손해배상 청구사건 2220건을 분석한 결과 손해배상 판결 인용액은 500만원 이하가 47.4%, 500만~1천만원 사이가 23.4%다. 70%가 1천만 원 이하인 것이다.


정청래 법안은 사실상 "현재 너무나 비현실적인 손해배상액 수준을 3배 수준으로 높이자"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현재의 손해배상액 산정 기준이 변하지 않는다면 정청래 법안이 채택된다고 해도 피해자의 절반은 1,500만원, 25%는 3천만 원 정도의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을 정도에 불과하다. '피해액의 3배'는 성문법 계열의 국가가 채택하고 있는 징벌적 손해배상의 일반적 기준이다.

 


손해배상 판결 인용액 비율/2020년 5월 20일 미디어오늘


우리 법 판례, 언론보도의 '악의성'에 대해 정밀한 기준 제시


기자협회는 마치 징벌적 손해배상 법안에서의 '악의성'에 대해 "불편한 보도라면 악의적이라고 느낄 수 있는 게 인지상정"이라며 대충 아무렇게나 주장할 수 있는 것처럼 얘기하고 있다. 그러나 언론보도에 의한 명예훼손 사건에 있어 우리나라 법원의 판례들은 '악의성'의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고의'에 대해 대단히 정밀한 판단 기준들을 내놓고 있다. 결코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식이 아니다.


우리나라 법 역시 개인의 인격권보다 언론 자유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경향이 강하다. 언론보도의 '진실성'에 있어서 '진실이라고 믿을 만한 상당한 이유'만 입증되면 민형사상 책임을지지 않는다. 즉 '허위의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진실이라고 믿을 만한 이유'만 있다면 처벌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나라 언론보도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이 논의되는 이유는 바로 '진실성'은 차치하더라도 '진실이라고 믿을 만한 최소한의 이유'라도 갖추려는 노력도 외면한 채, 뻔한 '허위 사실'을 몇 가지 진실과 섞어 '진실'로 포장해 보도하고 유포하는 행태가 극에 달해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과 언론법제 관련 이론에 대해 익히 알고 있을 기자협회가 이런 식으로 가소로운 반대를 늘어놓는 것 자체가 (기자협회가 좋아하는 미국식 기준으로 말하자면) "거짓임을 알거나 거짓인지 여부를 무모하게 무시한 짓", 즉 '현실적 악의'에 해당한다.


다시 한 번 얘기하지만 기자협회가 그렇게 좋다는 미국식 제도를 그대로 도입하자고 주장한다면, 나는 쌍수를 들어 환영하며 적극 지지할 의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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